부산진구 관광코스 서면근대산업유산추억길2

부산진구 관광코스 서면근대산업유산추억길2 소개

안녕하세요.
서면호빠입니다.

오늘은 서면호빠와 함께 서면근대산업유산추억길 중 옛 제일제당, 옛경남모직 옛터, 서면의 옛 극장가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부산진구 관광코스 서면근대산업유산추억길2

옛 제일제당

설탕의 원조, 한국 밥상의 역사가 머문 곳

한국전쟁이 끝날 무렵인 1953년 여름. 서면 아래쪽 동천변이 떠들썩했다. 부산진구 전포동 743번지, 1천여 평의 부지에
공장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공장 이름은 제일제당. 그해 11월 5일 공장에서 순백색의 설탕이 생산됐다. 외국산 설탕에만
전적으로 의존하던 때 우리 기술로 국내 최초의 정제 설탕이 탄생한 것이다. 이 사업을 진두지휘한 사람은 호암 이병철(1910~1987) 삼성그룹 창업주. 국산화로 사업 물꼬를 튼 제일제당은 ‘백설표’란 브랜드를 앞세워 사업을 크게 확장했다.
눈처럼 하얀 설탕, ‘백설표’는 이후 한국 밥상의 역사가 되었고, 제일제당에서 뿌리와 가지를 뻗은 삼성그룹은 국내 최대의
기업집단으로 성장했다.

제일제당 스토리

소사: 삼성그룹은 일제강점기인 1938년 이병철 회장이 대구에서 시작한 ‘삼성상회’가 그 모태지만, 사업이나 공장 규모로
보면 1953년 부산진구 부전동 537-9번지에 설립한 제일제당이 바탕이 되었다.
제일제당은 1996년 삼성그룹에서 분리 독립, 2002년 새로운 이름 CJ주식회사로 변신했고, 2007년 9월 CJ그룹의 지주회사
체제 도입으로 현재 사명인 CJ제일제당으로 거듭났다. 제일제당을 근간으로 하는 CJ그룹은 다소 복잡한 분화 과정을 거쳐
오늘날 이재현 회장 체제로 자리 잡는다. CJ제일제당은 부산진구 동천변에서 첫 정제 설탕이 생산되던 날인 11월 5일을
창립기념일로 삼고 있다.

에피소드

제일제당도 초창기엔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설탕 제조에 참여한 한 임원의 증언. “1953년 10월28일 시운전에 들어갔는데
기대했던 설탕은 안 나오고 콩깻묵 같은 것이 나왔다. 기계를 해체했다가 조립하기를 거듭하면서 갖은 궁리 끝에 어렵사리
설탕을 뽑아낼 수 있었다.”
설탕 제조는 당시로선 하이테크 산업이었고, 국민 밥상을 풍요롭게 하는 최고의 식재료였다. 초창기 제일제당에서 근무한
직원들의 자부심은 대단했다.
“당시 우리 월급이 20만 환이었어요. 그때 동천 주변의 10~20평 크기 집값이 15만 환, 김해평야의 논 한 마지기가 2만 환이었죠. 직원들은 물론 업계에서도 우리 회사를 ‘천하의 제일제당’이라 불렀어요.”(‘CJ 50년사’ 인터뷰 발췌)

옛경남모직 옛터

서면 패션 리더들의 혼방 양복지가 태어난 곳

K알고라텍스를 아실는지. 1960~70년대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고급 원단의 양장·양복지. 혼방(混紡)이라고 했다.
성질이 다른 섬유를 섞어 짜는 혼방은 당시로선 신기술이었다.서면의 패션 리더들은 보들보들한 감촉의 K알고라텍스로
옷을 해 입고 한껏 멋을 부렸다.
추억은 K알고라텍스를 낳은 경남모직의 부산 전포동 호시절을 기억한다.
1956년 설립된 경남모직은 전포동 668-1번지에 처음 둥지를 틀어 한일합섬 등 15개의 계열사를 거느리는 ‘섬유 제국’인
한일그룹이 되었다. 신사 숙녀들은 기억할지어다. 전포동 이 자리에서 그대들 패션의 부푼 꿈들이 영글었음을.

경남모직 스토리

소사: 경남모직은 김한수 씨가 1956년 미국의 원조 자금을 받아 부산진구 전포동에 설립한 회사다. 60년대 경제 부흥의
시대적 흐름을 타고 방적·염색·가공에 이르기까지 일괄 생산체제를 갖추면서 업계 선두 주자로 부상했다. 이때 출시한
K알고라텍스는 공전의 히트작이었다.
1967년 주력 계열사인 한일합섬을 마산으로 옮겼고, 박정희 정권의 수출 드라이브 정책에 힘입어 사세는 더욱 확장됐다.
80년대 들어 기업 여건이 어려워져 1986년 전포동 공장 라인을 마산으로 옮기는 구조조정을 단행하고, 1995년엔 공장 터까지 매각했다.
1997년 말에는 부도를 낸 뒤 법정관리를 받는 등 우여곡절을 겪다가 2006년 SM그룹의 계열사가 되었다.

에피소드

1970년대까지 경남모직은 제일모직과 함께 국내 모직업계의 쌍두마차였다. 섬유산업 등 경공업이 한국경제의 주축을
이루던 시절, “한일그룹(경남모직)에 다니는 미혼 남녀라면 최고의 신랑 신부감”이라는 말이 나돌 정도였다.
60~70년대까지만 해도 방적공장 취직은 배고픈 소녀들의 꿈이었다. 마산으로 본거지를 옮긴 경남모직(한일합섬)은 1974년
배움에 목마른 여공들을 위해 한일여실고를 설립했다.
국내 첫 산업체학교다. 개교식 땐 4000여 학생들이 각자 고향의 잔디를 옮겨 심어 ‘팔도잔디’ 운동장을 만들었다.
잔디는 푸른 꿈과 희망이었다. 한일여실고는 모기업이 어려워지면서 5만여 동문을 배출하고 2000년에 문을 닫았다.

부산진구 관광코스 서면근대산업유산추억길2 서면의 옛 극장가

서면 거리의 옛 영화 누가 기억 하리오

헐리우드·홍콩 키드들은 그저 극장 거리가 좋았다. 총천연색의 극장 간판은 영화 관람 욕구를 자극했고, 영화배우들에 대한
동경을 채근했다. 그 시절 서면 극장가는 화려했다. 중앙로변에 특별히 높은 건물이 없던 시기에 서면 로터리를 중심으로
나란히 자리잡은 3층 높이의 동보극장(1957~93), 태화극장(1962~82), 대한극장(1970~99) 등은 주말이면 관람객들로
북새통을 이뤘다.
70년대 극장이 많았을 때는 단관, 소극장 해서 40여 곳에 달했으나 지금은 5곳 정도가 남아 있다. 그 많던 극장과 소극장들은
어디로 사라졌을까. 무심한 시대 변화다.
돌아가고 싶은, 돌아갈 수 없는, 그렇지만 기억 속엔 또렷이 살아 있는 그 장면들. 영화의 도시여, 부디 서면 극장거리를
잊지 마시길.

서면 극장가 스토리

소사: 서면에 극장이 처음 등장한 것은 1947년 광복 직후였다. 가장 많을 땐 단관극장 16곳, 소극장 18곳, 멀티플렉스극장
5곳 등 모두 39개나 됐다. 범일동에서 서면으로 들어가다 보면, 범내골 로터리에 동아극장이 있었고, 서면 중앙로에 대한극장, 태화극장, 동보극장이 자리했다. 서면 로터리에는 북성극장이 있었고, 당감동 쪽으로는 천일극장, 동래 쪽으로 노동극장,
그리고 전포동 쪽으로 태평시네마가 있었다.
서면 극장가는 1960~70년대가 전성기였다. 영화는 남포동 개봉관과 동시개봉을 하면서 입장료는 저렴했다.
1959년 개관한 대한극장은 1900여 석을 갖춘 대형극장으로 학생들의 단체관람이 많았다.

에피소드

서면 극장가는 워낙 유명해서 70년대에 영화 좀 봤다고 하는 사람들은 저마다 이야깃거리를 품고 있다. 노(老) 관객들이
들려주는 에피소드 몇 토막. “의자가 철제여서 오래 앉아 있으면 허리가 아팠지. 영화가 재미있는데 그게 문제가 되나?
게리 쿠퍼, 아랑 드롱, 헨리 폰다, 커크 더글러스, 비비안 리, 엘리자베스 테일러 등 멋진 서부의 사나이들과 고혹적인
여배우들이 생각 나.”(60대 관객) “괜찮은 외화는 대부분 북성극장에서 봤다 아이가. ‘자이언트’ ‘무기여 잘있거라’ ‘콰이강의
다리’ ‘황야의 무법자’ 등이 떠오르지. 어지간한 영화는 미성년자 관람가여서 수업이 끝나면 부리나케 직행했지.
그런데 미성년자 관람불가 영화가 더 보고 싶더란 말야. 단속 임검 선생님들과 숨바꼭질하며 숨어서 보곤 했는데,
그 쾌감은 말할 수가 없었어.”(50대 관객)

출처 부산진구청

부산진구 관광코스 서면근대산업유산추억길2 소개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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