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진구 지명유래3 소개
안녕하세요.
서면호빠입니다.
오늘은 부산진구부암동, 당감동, 가야동의 유래에 대해 알아 보도록 하겠습니다.
부산진구 지명유래3
부산진구 지명유래3 부암동(釜岩洞)
부암동(釜岩洞)은 부전동과 같이 조선시대에는 동평면 부현리에 속하였다. 동천의 상류인 백양산에서 발원하는
감물내를 중심으로 고대리(古代里)에서 옛 개성중학교의 언덕바지 산인 통칭 백양산 앞의 지역을 말한다.
감물내가 시작되는 곳은 조선시대 지명으로 당리이고, 하천이 넓어지기 시작한 곳이 감물리이며, 그 아래 지역을
고대리(古代里, 古垈里)라 하였다. 감물내의 고대리 아래지역을 모두 부현리(釜峴里)라 하였는데, 이 부현리가
오늘의 부암동과 부전동으로 분리되었다.
부전동은 감물내의 동쪽 중 전포·범전의 평지에 붙여진 이름인데 비하여,
부암동은 내 주변의 구릉, 바위동산이 흩어져 있어 바위 암(岩)자가 붙여진 것으로 고대리와 이 마을 북쪽에
뒷골이라는 자연마을이 있었던 지역으로 보인다.
1979년 시조례에 의해 부암1,2동으로 분동되었다가, 1982년 동평2동을 부암3동으로 행정명칭을
개편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1998년 부암1,2동을 부암1동으로 통합하였다.
당감동(堂甘洞)
당감동(堂甘洞)은 금정산의 주맥인 백양산이 병풍처럼 둘러싸인 산록에 위치하여 있으며, 삼국시대의
동평현의 치소(治所)로 현재까지 동평현성이 남아있다.
당감동은『동래부지(1740)』방리조에 보이는 동평면의 당리(堂里)와 감물리(甘勿里)의 두 마을을 합쳐서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당감리라고 고쳐 부르게 됨으로서 생긴 동의 이름이다.
오늘날 당감동의 고무나무골에 수령이 오래된 고사목(枯死木)이 있었는데, 이 당산나무를 중심으로 동으로
직선을 그어 북쪽은 과거의 당리였고, 남쪽은 감물리였다고 한다. 당리라 한 것은 마을에 오래된 당집이 있어서
붙여진 이름으로 지금까지도 순조 25년(1825)에 세운 영숙사라는 신당이 남아 있다.
감물리가 변하여 감물이 되었다는 설과 신이라는 뜻의 검물내〔神川神水〕라는 설이 있다.
이로 견주어 볼 때 감물내는 부산천을 의미하는 고음이 아닐까 하는 추측도 낳게 한다.
당감동은 1914년 당감리에서 출발하여 1951년 당감1·2동으로 분동되었다가 1970년에 당감1동이 당감1동,
동평동으로 분동되었다.
1979년에는 당감1동이 당감1·3동으로 분동되었고, 동평동이 동평1·2동으로 분동되었다.
그리고 1982년에 동평1동이 당감4동으로, 동평2동이 부암3동으로 바뀌었다.
2013년 2월 1일부로 당감1,3동이 당감1동으로 통합되었다.
가야동(伽倻洞)
가야동(伽倻洞)의 유래는『동래부지(1740)』방리조에 보면,“가야리는 동평면에 속한 지역으로 관문에서
20리 거리에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가야라는 어휘의 뜻이 무엇인지는 아직 학계에서 정론을 얻지 못하고 있으나,『삼국유사』에 기록되어 있는
6가야의 가야를 의미하는 것에서 유래되었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옛날에는 지금의 고관, 즉 수정동으로부터 감고개를 넘어 가야동으로 왕래하였던 까닭에 이곳은 교통의 요충지에 해당되었다. 가야리란 명칭은 이 감고개 아래의 마을이란 뜻에서 생겨나지 않았을까 짐작된다.
1904년 경부선의 개통으로 동평면과 단절되고 대신 서면의 가야리로 되었다.
1903년 조선총독부에서 조사한 조선의 성에 의하면, 달성 서씨가 세거(世居:한곳에 대대로 살아 감)한 곳으로 알려져 있는데,
대체로 16대(代) 밖에 되지 않는 것으로 보아 임진왜란 전후에 이주해 온 것임을 추측할 수 있다.
1959년 개금동을 흡수하였다가, 1963년 다시 가야동과 개금동으로 분동하였다.
1970년 급격한 인구증가로 인해 가야1,2동으로 분동 되었다가, 1979년 가야2동을 다시 가야2,3동으로
분동하였으며 2013년 2월 1일부로 가야1,3동을 가야1동으로 통합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출처 부산진구청
부산진구 지명유래3 소개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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